산보
Cultureholic/하루의 잔상들

한동안 창문을 통해서만 밖을 바라봤다. 모기장을 통해보는 옆집의 풍경이란 보잘것 없이 키만 커다란 차가운 회색의 창고만 우두커니 있을 뿐 이었느나 그 지붕과 맞닿는 날렵한 하늘의 쪽빛갈은 여름이 깊어감을 여지없이 느끼게 하고 있었다. 좁은 나의 방은 점점더 온기가 머물러 살살 내 신경을 거슬리는 통에 불쌍한 선풍기는 쉴틈도 없이 돌고, 옆구리에 차고 있는 죽부인의 차갑던 촉감은 내 살과 맞붙은 탓에 불쾌한 따뜻함이 서려있었다.

제발 비가 내렸으면 내렸으면 하고 빌다가 잠드니 밤세 내린 비들이 하늘을 회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무거운 방문을 활짝 열자 선선함이 금세 어깨를 덮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덕분에 샤워를 끝내고도 금방이나 흐르는 땀방울들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었다. 허름하고 키작은 냉장고를 열고서 얼마전에 사둔 음료수를 냉큼 들이 마셨더니 있지도 안았던 체증이 다 내려가는 기분이다.

가만히 음악을 틀었다. 하루를 또 보내는 기분으로 '하드 보일드 하드 럭'을 집어 몇장을 넘길 때 즘이었다. 핸드폰에 저장되지 않은 전화번호가 요란히 울려댔다. 033의 지역번호로 봐서는 보나마나 군대에서 열심히 삽질 중인 친구녀석인게 분명했다. 머리속에서 교차한 두명중 하나란 생각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닥 음질도 좋지 못한 핸드폰의 음성으로도 참 우울한 매일을 보내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게 남는 통화였다. 그저 농담이나 몇마디, 살던 이야기나 몇마디 나누니 금방 20분을 보내고 전화를 끊었다. "힘든가 보군..." 이라고 혼자 중얼거리고 나자 조금씩 주위의 소리가 명확해 졌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붕을 간지르는 소리가 정겨웠다. 이따금 창문을 통해서 바람이 한자루씩 들이 닥쳤다. 너무나도 시원한 바람이었다. 당장 우리집 고철덩이들을 끄고 2년이나 신고 있는 허름한 신발의 끊을 질끈 묶었다. 집에서 제일 키가 큰 우산을 골라서 일단 집을 나섰다. 대문을 나서면서 부터 들리는 빗소리는 바라던 만큼 요란 하지 못했지만 내 발걸음을 옮기게 해주기에는 충분한 운율이었다.

호쾌하게 우산을 펼첬다. 가생이에 생긴 자그마한 구멍들이 실소를 자아냈다. 비가 내린다는 즐거움에 아무래도 좋다는 최면이라도 받은 기분... 우산을 하늘에 향하면서 한걸음 내 딛자 사정없는 비의 환영인사를 받았다. 집앞 저끝에 있는 하얀 아파트 단지가 눈을 사로 잡았지만 오늘은 좀 다른 길을 걸을 생각이었다. 담배나 한 보루 사올까 싶었지만 그래도 먼저 동네 끝에 있는 저수지를 가볼 생각이다. 어린 시절에는 자전거로 달려서 잔디를 타고 놀거나 물장난을 쳤었는데 최근에 KTX가 들어선 이후로 길도 지저분 해지고 무엇보다 그곳에 살던 친구가 이사를 가게되서 들러볼 이유가 없어 졌었다.

길 왼켠에 있는 수로에 제법 물이 차올라 있었다. 논에 물을 대는 농수로 인 만큼 여름이 다가 오지 않으면 여간해선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예전에는 소금쟁이랑 나뭇잎들이 어울어저서 하염없이 떠 다녔는데 어째선지 최근엔 보이지 않는다. 여름때면 맨손으로 소금쟁이를 잡는데에 여념이 없었다. 세명이서 수로를 막아서서 부산이 움직였었지만 한마리를 잡는 것도 여간해선 힘들었다. 일부러 온몸을 날려서 달려 든일도 많았다. 사실 소금쟁이를 잡는 다는 것 보다는 물속에 뛰어드는 것이 더 재미있었기 때문 일지도 모른다.

주머니의 담배각을 뒤졌다. 아쉽게도 덜렁 두가치만 남아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었다. 빗줄기가 조금 굵어짐이 느껴지자 흥에 겨워 그냥 입에 한가치를 물었다. 사실은 저수지에서 한대 피는 편이 더 성취감이 들었겠지만 그래도 바람이 이렇게 나를 반겨주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빨간색으로 물들여가며 깊게 바람을 들이 마셨다. 역시나 평소보다 상쾌했다. 바람이 불때마다 하얀 담배자루를 군대군대를 물에 적시고 말았으나 왠지 오늘의 빗물을 머금은 담배맛은 더 즐거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해서 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사실 그랬다.

수로의 문을 따라서 긴 언덕이 자리하고 있다. 빗물을 머금은 잡초와 산들은 육각정을 중심으로 한폭의 그림 같았다. 언덕을 따라 정자를 향해서 걸었다. 누구도 이용할 것 같지 않은 장소에 위치하고 있지만 의외로 왕례가 많은 듯하다. 난간을 따라 기둥까지 먼지는 쉬 찾아 볼 수 없고 방금전에도 누가 다녀갔는지 흙발자국이 물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정자에서 비를 삼키고 있는 저수지를 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살던 동네도 사라지고 낚시꾼도 한명 보이지 않았다. 아스팔트로 포장을 할 예정인지 시멘트 포장을 전부 없에 버려서 길에는 길게 바퀴자국만을 세겨놓은 듯 했다. 뒤로보이는 공장들은 예전에는 몰랐던 것들 이었고 조금 더 오른 쪽을 향해서는 낚시꾼을 상대로하는 민박집과 음식점이 몇곳 보였다. 한눈에 봐도 장사가 잘 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어둑해지는 동네에 서있는 가로등에 비춰 제법 운치는 있었다. 가만보면 몇사람 정도가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하였으나 너무 먼거리이기에 그저 그러려리 하고는 다시 집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하늘은 점점 깊어 지고 있었으나 좀전에 내가 찍어놓은 발자국은 계속해서 나를 향했다.

다행히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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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Icon 비트손 2007.06.29 19:01 신고 URL EDIT REPLY
마치 제가 그곳에서 담배한개피 피고 돌아온 기분입니다. 오늘 저도 산보 한번 다녀와야 겠습니다.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BlogIcon 숏다리코뿔소 박주호 | 2007.06.30 19:54 신고 URL EDIT
감사합니다^^
BlogIcon lovepool 2007.07.02 01:26 신고 URL EDIT REPLY
비가 내리는데 산보를 다녀 오신건가보군요. 예전엔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우산을 쓰던지, 아니면 그냥 조용히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도 했는데 언제부터 그것이 꺼려졌나 봅니다.
그전엔 머리와 옷이 흠뻑 젖는 느낌이 너무나 좋았는데..씻겨 내려가는 느낌이랄까요..
꼭 정신나간것 처럼 보이긴 하지만, 한번쯤 그렇게 정신 나간것 처럼 자연스럽게 되어 보는것이 좋았던게 아닌가 싶네요. 요즘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거든요...
BlogIcon 숏다리코뿔소 박주호 | 2007.07.02 08:06 신고 URL EDIT
산성비를 맞으며 운치를 즐기는 사람이야 사실 별로 없겠죠 요즘 ㅋ 양말도 젖고 바지 밑단도 버리고 싸구려 옷은 물도 빠지죠? ㅋ 그래도 저는 비가 오는게 굉장히 즐겁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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